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삼전도의 굴욕 (문단 편집) == 인조의 환복 ==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조선 임금이 삼궤구고두례를 마친 후 단에 올라 청 황제가 주는 차를 마셨으며, 잔치를 마친 후 용골대한테서 만주 의복인 초구[* 貂裘 : 담비의 가죽으로 만든 옷]를 받아서 갈아입고 뜰에 들어가 사례를 했다고 한다. 실제 기록을 보면 아래와 같다. 참고로 '상(上)'[* 실록에서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상'이 당대 임금이라고 보면 된다. 주상, 금상(今上)과 같은 의미.]은 인조를 의미한다. >용골대 등이 상(上)을 인도하여 진의 동문을 통해 나왔다가 다시 동쪽에 앉게 하였다. 대군(大君) 이하가 강도(江都 : [[강화도]])에서 잡혀왔는데, 단 아래 조금 서쪽에 늘어섰다. 용골대가 한의 말로 상에게 단에 오르도록 청하였다. [br] >[[숭덕제|한]][* 유래는 몽골의 [[칸]]. 청 태조 누르하치가 [[몽골]]을 복속시킨 뒤 그들의 지배자라는 의미로 칸을 칭하였다. 여기서는 청 태종을 가리킨다.]은 남쪽을 향해 앉고 상은 동북 모퉁이에 서쪽을 향해 앉았으며, 청 왕자 3인이 차례로 나란히 앉고 왕세자가 또 그 아래에 앉았는데 모두 서쪽을 향하였다. [br] >또 청나라 왕자 4인이 서북 모퉁이에서 동쪽을 향해 앉고 두 대군이 그 아래에 잇따라 앉았다. 우리 나라 시신(侍臣)에게는 단 아래 동쪽 모퉁이에 자리를 내주고, 강도에서 잡혀 온 제신(諸臣)은 단 아래 서쪽 모퉁이에 들어가 앉게 하였다. [br] >차 한 잔을 올렸다. 한이 용골대를 시켜 우리 나라의 여러 시신(侍臣)에게 고하기를, "이제는 두 나라가 한 집안이 되었다. 활 쏘는 솜씨를 보고 싶으니 각기 재주를 다하도록 하라." 하니, 종관(從官)들이 대답하기를, "이곳에 온 자들은 모두 문관이기 때문에 잘 쏘지 못합니다." 하였다. [br] >용골대가 억지로 쏘게 하자 드디어 위솔(衛率) 정이중(鄭以重)으로 하여금 나가서 쏘도록 하였는데, 활과 화살이 본국의 제도와 같지 않았으므로, 다섯 번 쏘았으나 모두 맞지 않았다.[* 유교의 6예 중 하나로 활 쏘기가 있었던 걸로 보면 정말로 문관이어서 활을 못 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조선 시대 사람들은 남녀노소 모두 활을 즐겨 쏘고 잘 쏘았다는 기록도 있다. 다만 [[각궁#s-7|항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만주 활과 국궁은 꽤나 차이가 있다. 어쩌면 조선측에서 청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실력을 보이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고, 이를 알고 청나라 쪽에서 망신을 주려고 일부러 시켰을지도...] [br] >청 왕자 및 제장(諸將)이 떠들썩하게 어울려 쏘면서 놀았다. 조금 있다가 진찬(進饌)하고 행주(行酒)하게 하였다. 술잔을 세 차례 돌린 뒤 술잔과 그릇을 치우도록 명하였는데, 치울 무렵에 종호(從胡) 두 사람이 각기 개를 끌고 한의 앞에 이르자 한이 직접 고기를 베어 던져주었다. 상이 하직하고 나오니, 빈궁(嬪宮) 이하 사대부 가속으로 잡힌 자들이 모두 한 곳에 모여 있었다. [br] >용골대가 한의 말로 빈궁과 대군 부인에게 나와 절하도록 청하였으므로 보는 자들이 눈물을 흘렸는데, 사실은 나인(內人)이 대신하였다고 한다. [br] >용골대 등이 한이 준 [[백마]]에 영롱한 안장을 갖추어 끌고 오자 상이 친히 고삐를 잡고 종신(從臣)이 받았다. '''용골대 등이 또 초구를 가지고 와서''' 한의 말을 전하기를, "이 물건은 당초 주려는 생각으로 가져 왔는데, 이제 본국의 의복 제도를 보니 같지 않다. 따라서 감히 억지로 착용케 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정의(情意)를 표할 뿐이다." 하니, '''상이 받아서 입고 뜰에 들어가 사례하였다.''' >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30일 경오 2번째 기사 맨 마지막 문단을 보면 청 황제에게 절할 때까지만 해도 원래 복장이었으나, 절이 끝나고 돌아갈 때 즈음에서야 [[타타라 잉굴다이]]에게서 청나라 갖옷을 받아 갈아입고 들어갔음을 알 수 있다. 이 부분을 두고 어떤 사람은 조선을 모욕하기 위해 인조에게 강요해 청나라 갖옷을 입혔다고 본다. 조선 입장에서는 의복은 제도상 사대하던 [[명나라]]의 [[천자]]가 결정하여 제후와 신하, 백성들에게 내리는 것으로, 의복은 중국에서 천자의 나라에 속하는 인물들과 그 외 속국의 인물들까지 천자가 정한 제도에 따라 의식주가 관리되는 것으로 천자의 절대 권력을 알리는 수단 중 하나였기 때문에 민감했을 것이다. 조선의 사람들은 왕이든 백성이든 명나라가 정한 옷 말고 다른 나라 옷은 입을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조선에서 그것도 왕이라는 사람이 명나라의 적인 [[청나라]]의 옷을 입었다는 건 매국과 다름없는 짓이었던 셈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청나라 담비 가죽옷 (즉 현대로 치면 밍크코트)은 사실 만주의 추위에서 고귀한 신분들이 입던 옷으로서 누르하치나 홍타이지[* 영화 남한산성에서 홍타이지가 입은 옷이다.]도 항상 입고 다녔고, 부하들에게 상이나 선물로 하사하던 것으로서 일설에서 주장하듯이 모욕을 주려던 의미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송산 전투]]에서 패한 [[홍승주]]가 한동안 감방에 갇혀 있을 때, 추위에 떨자 홍타이지는 자신이 입던 초구를 내려 귀순을 설득했다.] 게다가 가죽옷의 양식은 곤룡포나 관복과는 달리 대체로 엇비슷하기 때문에, 청나라나 명나라나 조선이나 별반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세종이 입던 초구를 집현전에서 잠든 [[신숙주]]에게 내렸다는 일화도 있을 정도로 짐승 가죽으로 만든 방한복은 조선에서도 자주 입고 있었다.] 그러니까 조선을 모욕하기 위해 입게한 것이라기보다도 진짜로 선물로 준 것에 가까울 수도 있다. 차라리 복종의 의미로 의복을 입게 하라고 했으면, 청나라 관복을 입게하면 되었을 텐데, 방한복에 가까운 옷을 주었기 때문이다. 다만 청나라 초구는 소매가 넓은 조선 옷에는 잘 안 맞았던 것으로 보이며 이 때문에 "본국의 의복 제도를 보니 같지 않다"고 한 것으로 보인다. 청나라는 삼전도 항복시에도 인조에게 군주로서의 용포나 신하로서의 단령 대신 평민이나 입는 남염의(藍染衣)를 입고 출성하게 했다.[* 드라마 [[꽃들의 전쟁]]은 곤룡포를 입혀 고증을 어겼다. [[추노(드라마)|추노]], [[남한산성(영화)|남한산성]]에선 이런 부분까지 제대로 고증이 구현된 편.] 이는 조선의 용포와 단령이 명나라에서 하사한 의복이기에 명나라를 싫어하는 청나라 입장에선 수용할 수 없었고, 거기에 조선 국왕은 청나라에 거역한 죄인이란 의미에서도 복장이 제한되어야 한다는 용골대의 의견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청나라 측은 이를 좀 더 굳히기 위해 항복 예가 끝나면 그대로 명나라에서 하사했던 고명과 의복, 장구류는 죄다 반납해라 했는데, 그 와중에 조선 측은 일말의 여지라도 챙기고 싶었는지 피난 중에 잃어버렸다며 핑계대고 보내지 않았다. 청의 목적은 조선이 명을 버리는 것이었고 실제로 이후 조선은 명을 적으로 돌렸으니까 청은 거짓이라는 것을 알아도 모른체하며 여기까지는 문제삼진 않았다. 위에서 말한 인조에게 갖옷을 선물한 의도가 어쨋든지간에, 청나라는 자신들의 지배하의 한족과는 달리 조선에 변발이나 호복을 강요할 생각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원래 법도대로라면 이 시점부터 인조는 명나라 제도인 [[익선관]], [[곤룡포]]를 버리고 청나라의 사발형 관모와 청나라 관복인 망수의를 입어야 했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조선 왕들은 그 후로도 나라가 망하고, [[경술국치|태황제 고종이 이태왕으로 강등되고]], 다시 [[일본 제국]]이 망하고 이왕직이 폐지될 때까지 명나라식 익선관과 곤룡포를 유지했다. 이를 두고 청나라가 '못 본 척했다'고 하는 경우도 있는데, 사신을 맞이할 때나 조공을 보낼 때나 그대로 명나라 식 사모관대를 하고 있었는데 척이든 아니든 모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물론 자기네가 정복한 한족한테는 가차 없었다. 다만 [[도사]]들과 [[경극]]배우들은 명나라풍 옷차림이어도 단속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연암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청 태종이 조선에게 청나라 의복을 강요하지 않은 것은, 기마전투에 편리한 청나라 의복을 조선이 사용하게 되면 무력을 길러 복수하려 들 것이니, 전투는커녕 일상 생활도 불편할 정도인 기존의 의복을 그대로 입게 하여 무력을 기르지 못하게 하려는 깊은 뜻이 있었다"고 해석했다. 청태종이 의복을 바꿔입게 한 것이 복종의 의미로 했다고 보는 측에서는 "옷을 가져왔다"고 하는 것은 의복을 하사하는 예법을 알고 있다는 것이고, "가져왔지만 제도가 다르므로 정의만 표하면 족하다"고 한 건 옷을 받는 복종의 의미가 충족되기만 하면 실제로 국가의 의복 제도를 바꿀 필요는 없다고 청태종이 직접 허락한 것이 된다. 인조는 안입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서는 스스로 나서 입음으로써 청나라의 체면을 세워준 것이라고 보면 되겠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